충청남도 공주시는 백제의 옛 수도로,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그 중심에는 금강을 내려다보는 공산성이 있다. 공산성은 백제 무령왕 시기부터 사비 천도기까지 전략적 요충지이자 왕성이었던 장소로,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다. 성 안쪽의 왕궁터나 공북루, 임류각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공산성 뒤편, 즉 북서쪽 산책로로 이어지는 구간은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조용한 뒷길에 대해 지역 주민과 향토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백제 시대 무녀(巫女)들의 제사 장소’가 이곳 어딘가에 존재했었다는 민간 전승이다. 이 이야기는 공식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공산성 인근 마을 어르신들이 구전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로, 백제 후기 종교문화와 여성의 역할, 신성한 제의 공간에 대한 단서를 품고 있다.
공산성의 역사와 북서쪽 외곽 산책로
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동서남북으로 성벽이 둘러진 고대 산성이다. 성 내부에는 왕궁터, 성곽로, 제사 유적 등이 복원되어 있어 체계적인 관광이 가능하지만, 북서쪽 외곽 산책로는 비교적 개발이 덜 되어 있다. 이 길은 공북루를 지나 임류각 뒤쪽 숲길로 이어지며, 조용한 나무길과 오르막길이 반복되는 코스로, 관광객들이 비교적 적게 찾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금강변을 내려다보는 뷰포인트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구릉지형, 오래된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 지역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비공식적으로 ‘무당바위’ 또는 ‘여제터(女祭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가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으며, 공산성 안내문에도 나오지 않지만, 지역 주민들 중 몇몇은 "그 뒤편 숲길 어디에 무녀들이 제사 지내던 자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 외곽 산책로는 일반적인 관광 동선과 달리 역사적 감정선이 더욱 깊이 남아 있는 구간이다. 주변에 현대식 구조물이 거의 없어, 자연과 역사의 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백제 무녀들의 제사 장소 – 구전 전승으로 남은 비공식 역사
백제 시대에는 무속 신앙이 왕실과 민간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왕궁이나 성곽 내에는 국가적 제사 외에도, 자연신을 섬기고 조상의 넋을 기리는 여성 중심의 비공식 제의 활동이 존재했다. 이런 제사는 종종 무녀들에 의해 주관되었으며, 이들은 종교인이자 치유자, 예언자 역할을 했다.
공산성 뒷편에 남아 있다는 무녀 제사터 전승은 주로 공주 중동마을과 웅진동 토박이 어르신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며, “성 뒤편 숲속 돌무더기 근처에서 하얀 옷 입은 여인들이 밤에 제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전승은 1950년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이어졌으며, 실제로 공산성 북서편 능선 아래 작은 제단 형태의 돌무더기와 불에 그을린 바위가 발견된 적이 있다.
또한, 일부 구술 자료에서는 “제사가 끝난 다음날이면 새가 울지 않았고, 동네 개들도 멀리서 짖었다”는 식의 초자연적 반응이 언급된다. 이는 단순한 민담이라기보다는, 백제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이어져 내려온 무속 의례의 마지막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이 무녀들의 공간은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작고 낡은 흔적이지만, 백제 여성들이 어떻게 신을 섬기고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장소다.
무당바위 근처를 걸으며 느낀 고요한 감정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공산성 북서쪽 산책로를 따라 직접 걸어보았다. 주말 아침이었지만 이 구간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초입부터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시야가 좁아졌다. 한참을 걸어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왼편으로 꺾이는 작은 비탈길이 나타났고, 그 아래에는 돌무더기와 낡은 바위 몇 개가 모여 있는 자리가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돌을 쌓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주변에는 불에 탄 흔적과 향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눈을 감자, 이상하게도 아주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바람소리조차 무겁게 들렸고, 어딘지 모르게 신성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무녀들이 흰 옷을 입고 바위 앞에서 염을 올리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제사의 대상이 신이었든 조상이었든, 그들은 분명 이 땅 위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고,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경험은 관광지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구경’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들어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외부인이 아닌, 과거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간 듯한, 낯설지만 깊이 있는 감정.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왠지 더 이상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은 공간의 긴장감이 있었다.
이름 없는 공간 속, 백제의 숨결을 마주하다
공주 공산성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유적지이지만, 그 뒤편 산책로 어딘가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백제 여성들의 흔적이 조용히 남아 있다. 무녀라는 존재는 역사 기록에선 종종 왜곡되거나 축소되어 왔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정서와 영적 균형을 지탱하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공산성 북서편의 작은 돌무더기와 구술 전승은 그러한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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