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일반적으로 호수와 레저, 닭갈비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관광지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깊고 조용한 역사적 공간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춘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봉의산이다. 봉의산은 시민들이 자주 찾는 산책 코스이지만, 그 정상부에 고려시대의 폐사지와 탑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춘천 시내를 내려다보는 봉의산 정상은 지금은 단순한 쉼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거 사찰이 존재했던 자리다. 이곳에서는 지대가 넓게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고, 일부 석축과 석재 유물들이 남아 있어 전문가들은 이 자리를 고려 중후기 사찰의 터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답사자들에 의해 탑재로 보이는 석재와 기단석이 부분적으로 확인되면서, 과거 이곳에 불탑이 세워졌던 정황이 제기되고 있다.
봉의산 정상 폐사지 – 위치와 현황
봉의산은 강원도 춘천시 요선동과 소양동 경계에 위치한 해발 약 440m의 낮은 산이다. 산 자체는 높지 않지만, 춘천 시내 중심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해 시민들에게는 일상적인 산책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정상까지는 약 30~40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봉의산 정상에 다다르면, 일반적인 산의 정상과는 다른 특이한 지형이 눈에 띈다. 정상 일대는 비정상적으로 넓은 평탄 지형으로, 자연 지형보다는 인위적으로 다져진 공간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석축과 낮은 단이 존재하며, 중심부에는 사각형 형태의 석재 구조가 일부 남아 있다. 오래된 지형도를 비교해보면, 이 자리는 과거 '사찰지'로 표시된 적도 있다.
현재 이 폐사지는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춘천시 문화관광과나 지역 향토사 연구회에서는 고려 중기~후기 사이에 존재했던 중소 규모 사찰의 유적지로 보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탑재 조각과 석불대좌, 불상 잔편 등이 일부 산재되어 있었고, 일부는 인근 사찰이나 시립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원형이 남아 있어, 현장에서 과거 사찰의 흔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드문 장소다.
고려시대 탑의 흔적 – 사라진 불탑의 존재 이유
봉의산 정상의 폐사지는 단순한 암자나 수도처가 아닌, 정식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석재 구조물 중에서 탑재로 보이는 사각 석판과 기단의 일부로 추정되는 둥근 판석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고려시대 불탑이 세워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탑은 대개 왕실과 귀족의 후원, 혹은 국방·풍수적 의미에서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봉의산은 춘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중요한 지점으로, 도시의 북방을 수호하고 기운을 잡아주는 상징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봉의산은 또한, 예로부터 풍수적 ‘북산’의 역할을 했던 장소로, 고을을 지키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장소에 탑을 세우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역 공동체의 안녕과 수호를 기원하는 신앙적 상징물로서 기능했다.
문헌기록에는 봉의산 사찰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나 《여지도서》 등에는 춘천 지역 산사들 중 “봉산사(鳳山寺)” 혹은 “봉정사”로 불린 절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것이 현재의 봉의산 정상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지리적 위치와 잔존 유물, 그리고 풍수적 입지 조건을 종합할 때, 탑의 존재는 단순한 추정에 그치지 않는다.
현장 체험기 – 그 자리에 서면 느껴지는 이상한 평온
나는 따뜻한 봄날,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봉의산을 올랐다. 산 전체는 도심에 인접해 있음에도 놀라울 만큼 조용했고, 등산객도 많지 않았다. 등산로는 비교적 부드럽고 완만했으며, 중간중간 춘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자주 등장했다. 그날 하늘은 맑았고, 소양강과 시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내 목적지는 그 이상이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뾰족하게 솟아 있어야 할 ‘정상’이, 평지처럼 평탄하고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은 돌과 흙이 섞인 평평한 지형이었고, 곳곳에는 인공적으로 깎인 듯한 석재들이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특히 정중앙에는 탑의 기단으로 보이는 네모난 석판이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무언가를 받치던 받침돌 모양의 석물이 일부 드러나 있었다.
그곳에 서 있으니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침묵이 흘렀다. 도시 한복판인데도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 자리가 예전에는 어떤 형상의 탑이 서 있었는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경건함과 정서적 울림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었다. 마치 과거 시간의 흔적이 지금 이 순간에 겹쳐져,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를 조용히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무리
봉의산 정상의 폐사지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 안내판도 없고, 설명도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 실제로 가본 사람은 알게 된다. 이곳은 우연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신앙과 염원이 모여 있던 중심 공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문화재나 유명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진짜 역사는 그렇게 표지판이 붙은 곳이 아니라,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잊어버린 장소에 더 자주 숨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춘천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소양강 스카이워크나 의암호에서 조금만 벗어나, 봉의산의 이 조용한 정상에 올라가 보기를 바란다. 관광객의 소음도, 상업적 유혹도 없는 그곳에서는 시간의 무게와 침묵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탑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중심이었고, 기도였으며, 기다림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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