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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제주 표선 해안의 숨겨진 흔적 – 일제 밀수선이 닿았던 그곳을 걷다

제주도는 단순한 관광 섬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의 해안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닷가의 모습이지만, 그 바다 아래에는 수백 년간 쌓인 이주, 교역, 통제, 감시, 침략, 그리고 저항의 흔적들이 깊이 눌려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도는 일본군에게 군사적으로, 그리고 물류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으며, 해안선을 따라 공식 지도에 나오지 않는 접안 지점과 잠입 경로가 수없이 존재했다.

그중 제주 남동부에 위치한 표선면 해안 일대는 수심이 얕고 바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일제 시절 공식 항구가 아닌 비공식 밀수선 접안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전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표선면은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된 표선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만, 주민 중 일부는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 배가 밤마다 들어왔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증언은 단지 민담이나 전설로 치부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도 표선리 인근 일부 해안에서는 바닷가에 부자연스럽게 쌓여 있는 돌무더기, 움푹 파인 접안 흔적, 부식된 철 구조물 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공식 문헌이나 지도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현장에서 몸으로 느낀 이상한 침묵과 구조물들은 분명 무언가 기능을 가졌던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제주 표선 해안의 숨겨진 흔적 – 일제 밀수선이 닿았던 그곳을 걷다

표선면 해안의 지형 특성과 일제시대 해상 경로

표선면은 제주도의 남동부에 위치하며, 해안선 대부분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지닌 백사장 혹은 암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선해수욕장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지만, 그 동쪽으로 이어지는 하도리, 성읍리 사이의 자연 해안 지형은 지금도 개발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의 해안선은 짙은 현무암 지형과 바다 쪽으로 둥글게 들어간 자연형 포구 형태가 곳곳에 존재하며, 수심도 깊지 않아 소형 목선의 접근에 유리한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해안 지형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과 밀정, 정보통신 요원이 제주 해안선 곳곳을 은밀히 활용했던 배경이 되었다. 특히 제주도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향하는 ‘해상 정보 경로’의 중간기착지로 활용되었으며, 보급선이나 특수선박이 감시망을 피해 비공식 해안선에 잠시 정박해 사람과 물자를 내리던 장소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표선면은 그중에서도 동쪽 바람이 적고 지형이 포근한 해안이 넓게 펼쳐져 있어, 공식 기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현장 자체가 ‘접안하기 좋은 구조’를 갖춘 장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밀수선은 군사 목적으로만 운용된 것이 아니라, 민간 물자 교환, 통신장비 반입, 특정 인물의 은밀한 이동 등을 위한 다목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제주도의 경우 조선 본토와 오키나와, 나가사키 해역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활용되었으며, 군사기밀뿐 아니라 농업 물자와 광물의 비공식 이동도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표선 해안’은 감시가 약한 틈새 해안으로서 일제가 선호했던 지형 조건을 고스란히 갖춘 곳이었다.

밀수선 접안지 – 전승되는 지명과 사람들의 이야기 

제주도의 특징 중 하나는, 기록보다 구술이 더 정확한 장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표선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역 토박이 어르신들 중 80대 이상 고령자들 일부는 여전히 “우리 어릴 때는 밤에 바닷가에서 사람을 보면 다들 숨어버렸다”는 말을 전한다. 이는 단순히 해적이나 밀수 때문이 아니라, 공식적인 이유 없이 나타나는 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들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구체적으로는 “배가 들어오면 사람 하나만 내리고 바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무거운 자루를 지고 갔다”는 식의 증언이 이어진다. 이는 무기 전달이나 밀정 파견, 또는 군사정보 문서 전달과 같은 활동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지금도 해안 인근 마을에서는 ‘배자리’라는 이름이 구전되고 있으며, 그 명칭은 공식 지명이나 주소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어민들은 그 구역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 중 일부는 “배가 머무르던 그 자리엔 예전엔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 돌무더기는 사람 손으로 일정한 높이로 쌓아졌고, 그 위에 석판이 놓여 있었다”는 기억을 전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군사 접안지나 상륙지점의 표시를 위해 만들어졌던 ‘은폐용 구조물’의 일종일 수 있으며, 현재는 대부분이 풍화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지형의 배치와 주변 바위 상태가 자연스러운 풍경과 다른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이처럼 말로만 전해지지만, 사람들의 감각과 기억 속에는 분명히 어떤 진실이 남아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다시 확인해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현장 탐방기 – 조용한 물가와 침묵 속의 흔적 

나는 이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로 표선면 동쪽 해안을 따라 하루 종일 걸었다. 차로 갈 수 있는 구간이 끝나고부터는, 해안을 따라 걷는 좁은 오솔길이나 바위길을 이용해야 했으며, 곳곳에는 통행이 어렵게 막힌 지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오히려, 그 장소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조용히 방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서였다.

오후가 깊어지고, 바닷바람이 조금씩 서늘해질 무렵, 나는 한 바위지대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해변과 달리, 둥그런 곡선으로 패인 바위 절벽과 그 안쪽에 움푹 들어간 조그만 해안골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심은 깊지 않았고, 바람은 거의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 공간은 마치 작은 배 한 척이 조용히 닻을 내리고 기다릴 수 있는 형상이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느껴진 어색한 고요함과 감정의 정지였다. 해변이었지만, 새소리도 파도 소리도 희미했고, 마치 시간의 흐름이 끊어진 듯한 무언가가 그곳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에는 자연스럽지 않게 쌓여 있는 돌 무더기와, 일부 부러진 콘크리트 구조물의 조각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이곳을 마지막으로 밟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배, 그리고 지금은 말할 수 없는 물건을 품고 있었던 그 밤의 시간들을 상상했다. 사진도 몇 장 찍었지만, 결국 나는 그 중 일부만 남겼다. 이 공간은 글로만 남기는 것이 더 온전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