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푸른 바다와 다도해를 배경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회 한 접시를 즐길 수 있는 도시로 익숙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사람과 물자, 정보가 오가던 해상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깊은 역사가 숨어 있다. 특히 벽화로 유명한 동피랑 마을은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찾는 사진 명소지만, 바로 그 아래쪽에 있는 언덕 아래의 항구 공간은 사람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근대 해상무역의 실제적 터전이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동피랑은 원래 통제영의 동쪽 포루(砲樓), 즉 '동포루'가 있던 곳으로, 통영항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감시 고지였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며 이곳은 점차 군사적 기능에서 생활과 생업의 공간으로 변모했고, 언덕 아래쪽은 상인, 수공업자, 소형 선주들이 드나들던 소규모 해상무역의 접안지로 활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동피랑 아래 부두는 배 한 척, 짐 한 자루가 오고가는 진짜 생활 항구였던 것이다.
이 공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지도에도 남아 있지 않고, 공식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 어르신들의 구술, 남아 있는 구조물, 골목에 남겨진 건물 형태 등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이곳이 단순한 옛 항구가 아닌 근대기의 실질적 생활무역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도 현장에서 확인 가능한 계단식 석축, 부식된 철고리, 창고형 건물 구조는, 무역의 흔적이 물리적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피랑 마을의 지리 구조와 아래쪽 항구 유적
동피랑 마을은 통영항의 동쪽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지금은 '벽화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은 형형색색의 그림과 골목길의 감성을 즐기기 위해 이 언덕을 오르지만, 이 마을의 원래 정체성은 군사적 감시와 해상 방어를 위한 전략적 고지였다. 통제영 시절 동포루가 자리하던 곳이 바로 이 동피랑 언덕이며, 이는 통영항 전체를 조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며 군사적 기능은 약화되었고, 동피랑은 점차 저소득 서민층과 상인들의 거주지로 변화하게 된다. 이 변화의 핵심은 바로 언덕 아래쪽에 접해 있는 항구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통영항은 근대항만으로 변모하던 시기였고, 대규모 선박은 통영 중앙항으로 집중되었지만, 소형 무역선, 보급선, 그리고 일상 물자 이송용 선박들은 동피랑 아래쪽 부두를 이용했다.
지형적으로 이 구간은 완만한 언덕과 바다 사이가 짧은 거리로 이어지는 구조다. 언덕을 내려가면 바로 바다와 맞닿고, 자연적으로 파여진 포구 형태의 지형이 많아 소형 배가 정박하기에 유리한 천연 접안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매립되거나 도로로 덮였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골목 구조와 일부 계단형 석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동피랑 주차장과 중앙시장 사이에 위치한 골목길을 따라가 보면, 일제시대 혹은 그 직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시멘트 블록 구조의 창고와 철재 고정틀, 그리고 바다로 향하던 오래된 석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지금도 기능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과거 무역·하역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하는 실체적 흔적이다.
숨겨진 해상무역 흔적 – 물자, 사람, 그리고 말 없는 거래
통영은 한려수도의 중심에 있는 바다 도시다. 하지만 오늘날의 통영항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해상 기능을 수행했던 장소였다. 특히 동피랑 아래 부두는 대형 화물선이 아닌, 생활형 선박들이 드나들던 생활 항구였다. 이곳에서는 쌀, 미역, 소금, 생선, 목재 같은 작은 물품들이 조용히 오가며,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가는 수공업자와 소상인들의 해상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곳의 해상무역은 공식적인 세관 통제를 거치지 않은 반공식적 거래가 많았다. 특히 해방 이후 혼란기와 6.25 전쟁 전후에는, 정부의 경제 질서가 느슨했기 때문에 물자가 현지 해상으로 직접 유입되는 경우도 흔했고, 이에 따라 동피랑 아래 부두는 지역 내 ‘조용한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물건이 저기서 들어왔대’라는 식의 말이 조용히 오갔고, 마치 말 없는 시장이 항구에 붙어 있었던 것처럼 기능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기억은 이를 뒷받침한다.
“어릴 땐 저 아래쪽에 배가 들어왔어요. 큰 배는 아니고, 돛단배나 통통선 같은 거요. 선주가 골목을 따라 올라오면 집집마다 물건을 나눠받았고, 때로는 새벽에 무겁게 뭔가를 실은 수레가 언덕길을 오르던 기억도 있어요.”
이 증언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실제로 지금도 동피랑 마을 아래쪽에는 창고형 건물 2~3곳이 남아 있으며, 그중 일부는 문이 닫힌 채 폐건물로 남아 있다. 그 건물들의 구조는 1층은 넓은 콘크리트 바닥에 차량 진입로가 있고, 2층은 주거 혹은 사무공간으로 쓰이던 흔적이 남아 있어 화물 하역을 전제로 설계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다 방향 벽면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레일형 철고리와 철제 줄 고정구가 삽입된 채 녹슬어 있는데, 이는 소형 화물선에서 직접 건물 쪽으로 물자를 당기기 위한 구조로,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과거 해상무역의 실물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장 탐방기 – 돌계단, 창고 터, 바다의 기척
나는 한낮 관광객들이 북적이던 시간을 피해, 늦은 오후에 동피랑 마을을 다시 찾았다. 벽화 골목을 천천히 오르던 사람들과 반대로 나는 마을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택했다.
그 길은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보였지만, 몇 걸음 들어서면서 풍경이 달라졌다. 화려한 벽화 대신 낡은 시멘트 벽과 오래된 수도관, 군데군데 떨어진 벽돌 담장이 이어졌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나를 둘러쌌다.
10분 정도 내려가자, 바다를 향해 열린 작은 계단형 돌길이 나타났고, 그 끝에는 지금은 기능하지 않는 시멘트 기반 구조물과, 부서진 창고 터가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바닷가를 따라 설치되어 있던 금속 고정물, 즉 배를 묶던 고리가 아직 그대로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녹슬었지만,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이 자리에 누군가 배를 대고, 짐을 내렸고, 다시 떠나갔다는 사실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그 주변에는 이미 폐허가 된 건물이 있었고, 그 내부에는 무너진 목재 구조물과 옛 시멘트 바닥이 남아 있었다. 한쪽 벽에는 번호가 적힌 문짝, 그리고 아마도 창고 구역을 구분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제 문틀 잔해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옛날 창고인가 보다”라고 지나칠 수 있지만, 이 공간은 분명 수십 년간 생활과 바다가 만나던 현장이었다.
그곳에 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말이 줄었다. 바람은 조용했고, 바다는 그날 따라 출렁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그 공간이 말을 걸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자리엔 기억이 있었고, 소리 없이 사람을 기다리는 공간의 ‘기척’이 분명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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