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는 설악산과 동해바다 사이에 자리한 도시다. 관광객들에게는 설악산의 웅장함과 영금정, 속초항의 싱싱한 회거리로 기억되지만,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과 마을에는 관광 안내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청대산은 속초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외지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청대산은 해발 450m 남짓한 낮은 산이지만, 과거에는 속초 동쪽 마을 사람들의 산신제와 공동 기도의 대상이었고, 등산로 곳곳에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청대산 동사면에 자리했던 옛 민간신앙 제단터는 한때 마을 공동체 전체가 모여 정한수를 올리고, 풍어를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고, 등산객들도 대부분 그 존재를 모르지만, 일부 지역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청대산에 신의 자리가 있었다”는 말이 회자된다.
청대산과 속초의 지형적 맥락
청대산은 속초시 조양동과 도문동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낮지만 속초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산은 설악산처럼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진 않지만, 지형상 바다와 도시, 산이 동시에 조망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 풍수적으로도 중요한 배산임수의 요지로 평가받아 왔다. 실제로 조선 후기 속초 지역 마을지도나 향토기록에서는 ‘청대산을 병풍삼아 마을을 보호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청대산을 단순한 산이 아닌 신령과 사람의 경계를 잇는 장소, 즉 제의적 기능을 갖춘 신앙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속초의 어촌마을들이 강한 해양 의존적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마을마다 바다를 향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해안에서 가까운 높은 곳에 제단을 설치하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청대산은 그 요건을 모두 갖춘 곳이었다.
제단이 설치된 구역은 보통 남동쪽 능선 중턱이며, 오래된 사람들의 기억에 따르면 “제단 뒤쪽으로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고, 앞쪽으로는 마을의 연기가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지고 산책로가 정비되면서 그 자리는 잊혔지만, 여전히 일부 길목에서는 다른 공간과는 다른 불규칙하게 남은 바위단과 조각난 석재들이 나타난다. 그 자리는 한때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엎드렸던 공간이었다.
민간신앙 제단터의 유래와 사람들의 기억
청대산 제단터는 속초 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흔적 중 하나다. 속초는 본래 작은 어촌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풍어와 가족의 무사,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제를 지냈다. 산신에게 드리는 제사, 즉 산신제는 마을 단위로 진행되었으며, 특별히 마을 공동기금으로 제물을 마련하고, 정해진 날짜에 모두가 모여 엄숙한 의식을 올렸다.
청대산 제단터는 그 중심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폐허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제를 지내기 위한 돌단, 향로 받침돌, 금줄을 걸기 위한 나무 말뚝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역 노인들은 “그 자리에 아이들은 함부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제사가 끝난 다음 날에는 항상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는 기억도 남아 있다.
이러한 제의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한마음으로 불확실한 자연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던 사회적 장치였다. 바람이 거세면 조업이 어렵고, 병이 돌면 마을 전체가 고통받던 시절, 청대산의 제단터는 마을의 생존과 연결된 ‘마음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마을이 흩어지고,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이 제단터 역시 잊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 주민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면 “느낌이 다르다”고 말하며, “무언가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그 장소를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다.
현장 탐방기 – 제단의 흔적과 공간의 감정
나는 평일 오전, 사람들이 적을 시간대를 택해 청대산을 올랐다.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가벼운 등산화와 소형 배낭이면 충분했다. 청대산은 조용했고,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정상을 지나 남동쪽으로 살짝 내려가자, 일반 등산객들이 자주 가지 않는 비포장 오솔길이 나타났고, 그 길을 따라 약 15분을 걷자 묘하게 평탄한 바위 지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딱히 안내판도, 설명도 없었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바위 단차와 마치 누군가 쌓아 올린 듯한 납작한 돌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고,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그곳에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목소리를 낮추게 되었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울리는 장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위 틈 사이에는 그을린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었고, 돌 하나 위에는 오래전에 놓았던 향로 받침대의 흔적처럼 움푹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실제 향로의 흔적인지, 단순한 자연형석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 그 자리는 누군가 한동안 머물렀던 자리였다.
그 공간에 앉아 있으니, 단순한 경치 이상의 감정이 차올랐다. 이 자리에 누군가 정한수를 올리고, 아이의 무탈함을 빌고, 바다가 잠잠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지금은 나만 있었지만, 오래전 이 자리에는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절을 하고, 조용히 소원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자리에 앉아, 그들의 눈으로 다시 속초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동피랑 마을 아래 숨겨진 근대 무역 터 – 사라진 부두를 따라 걷다 (0) | 2025.06.25 |
---|---|
제주 표선 해안의 숨겨진 흔적 – 일제 밀수선이 닿았던 그곳을 걷다 (0) | 2025.06.23 |
인왕산 정상 인근 금줄터 – 서울 도심 속 민간신앙의 숨겨진 자리 (0) | 2025.06.22 |
보령 대천해수욕장 뒷산의 비밀 – 일제 탄약고와 마을 전설 (1) | 2025.06.19 |
고창 읍성 외곽에 숨겨진 일제 밀정 은신처 – 기록되지 않은 역사 (0) | 2025.06.18 |
포항 내연산 숲속의 숨겨진 기도처 – 은둔한 승려들의 고요한 수행지 (0) | 2025.06.17 |
춘천 봉의산 정상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탑의 흔적 – 잊힌 폐사지 탐방기 (0) | 2025.06.16 |
사라진 광부 마을, 한반도 폐광촌에 남겨진 유적을 걷다 (1) | 2025.06.05 |